
마약 범죄 영화를 보면서 형사보다 악당이 더 기억에 남은 적 있으신가요? 저는 《독전》을 보고 나서 정확히 그 경험을 했습니다. 류준열과 조진웅이 나온다는 것만 알고 별 기대 없이 틀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류준열이 연기한 락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선생과 락, 정체를 감추는 영화의 몰입감
《독전》은 마약 조직의 정점에 있는 '이 선생'이라는 인물을 추적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이 선생'이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마약 카르텔의 수장으로, 영화 내내 그 정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조직도 모르고, 형사도 모르고, 관객도 모르는 상태가 끝까지 유지되는 구조입니다.
저는 SF처럼 비현실적인 세계관보다 실제 사회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훨씬 좋아합니다. 그런 제 취향에서 《독전》은 처음 화면부터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형사 원호가 5년을 이 선생 하나만 보고 달려온다는 설정도, 거대한 마약 유통 조직의 연결망도, 어딘가 실제 수사극의 냄새가 났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아이가 잠든 늦은 밤에 OTT로 혼자 보는 범죄 영화는 영화관에서 볼 때와 분위기가 꽤 다릅니다. 소리를 낮추고 화면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긴장감이 더 날카롭게 들어옵니다. 《독전》도 그런 환경에서 봐서인지, 조용한 장면에서 주고받는 대사 하나하나가 더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류준열이 연기한 락은 서사 구조상 앙티히어로(anti-hero)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앙티히어로란 전통적인 영웅의 덕목을 결여하고 있지만, 독자나 관객이 감정적으로 이입하게 되는 복잡한 주인공 유형을 말합니다. 락은 말이 없고, 표정이 없고, 이유도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눈이 갑니다. 상처가 눌려 있는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생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가 자주 사용하는 맥거핀(MacGuffin) 기법도 이 영화에서 제대로 작동합니다. 맥거핀이란 이야기를 끌어가는 소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핵심이 아닌,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장치를 말합니다. '이 선생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일종의 맥거핀으로 작동하면서, 관객은 계속 의심하고 추리하며 영화에 붙들려 있게 됩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락이 거의 아무 감정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들: 감정 없이 움직이는 인간이 오히려 더 무섭다는 걸 처음으로 체감했습니다.
- 이 선생 정체를 둘러싼 반전이 드러나는 후반부: 예측하려 했지만 완전히 맞지는 않았고,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습니다.
- 김주혁 배우가 연기한 진하림의 마지막 장면: 이 부분은 영화 이후 뒤에 알게 된 사실 때문에 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아쉬움과 김주혁, 영화가 끝난 후에 남는 것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중간중간 뭔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계속 들었습니다. 전기 관련 업무를 하다 보면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끝까지 따져보는 습관이 생깁니다. 설비 문제도 어딘가 논리적인 흐름이 있어야 해결이 되거든요. 그런 제 입장에서 《독전》의 서사는 중간중간 논리의 연결이 약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특히 서사 개연성(narrative plausibility), 즉 인물의 행동이 관객에게 납득될 수 있는 서사적 근거가 부족한 부분이 눈에 걸렸습니다. 서사 개연성이란 등장인물의 선택이 그 이전의 상황이나 심리와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관객이 몰입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입니다. 락이 어떻게 그 나이에 그 규모의 마약 조직 안에서 '이 선생'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 어린 시절 컨테이너에서 겪은 경험이 그 이후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영화는 끝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부분이 채워지지 않으면 영화가 끝나고 나서 이야기보다 장면이 먼저 기억에 남습니다.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저는 보고 나서 인물과 사건을 오래 곱씹을 수 있는 영화를 더 좋아합니다. 결혼 전 부모님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주차장에서도, 집에 오면서도 줄거리와 인물 이야기를 오래 나눴는데, 《독전》은 그런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는 영화였습니다.
국내 마약 범죄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의 배경이 얼마나 실제에 가까운 지도 느껴집니다. 대검찰청 범죄분석에 따르면 국내 마약류 사범 검거 인원은 2022년 기준 1만 8천 명을 넘어섰고, 최근 수년간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출처: 대검찰청). 영화 속 유통망이 단순한 픽션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자막을 확인하다가, 진하림을 연기한 김주혁 배우가 2017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TV 프로그램 1박 2일에서 봤던 그 얼굴과, 《독전》에서 광기 어린 연기를 했던 그 배우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쉽게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배우의 연기 스펙트럼(acting spectrum)이란 한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감정과 캐릭터의 폭을 말하는데, 김주혁 배우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이제야 제대로 느꼈습니다.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도 그의 필모그래피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독전》은 완벽한 영화는 아닙니다. 서사보다 분위기와 배우의 존재감으로 밀어붙이는 영화에 가깝고, 논리적인 인과 관계보다 감각적인 긴장감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보고 나서 몇 가지 장면이 며칠째 머릿속에 남아 있다면, 그 영화는 뭔가 제 역할을 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이라면 영화 자체를 보시기를 권합니다. 저처럼 결말 직전까지만 보고 마지막은 직접 확인하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