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싱가포르, 제1회 응창기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 결승 최종국. 조훈현 9단이 바둑 종주국 중국의 섭위평 9단을 꺾고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른 바로 그 실화가 영화 승부의 시작점입니다. 저도 이 영화를 아버지와 함께 극장에서 봤는데, 어릴 때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소소한 내기를 하던 기억이 불쑥 떠오를 만큼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바둑 역사가 만든 무대, 응창기배의 의미
응창기배(應昌期杯)는 최초의 프로 기사 세계 선수권 대회입니다. 여기서 응창기배란, 대만의 바둑 후원자 응창기가 설립한 대회로 당시까지 국가 단위로 나뉘어 있던 프로 바둑을 하나의 무대에서 겨루게 만든 역사적인 국제 기전(棋戰)입니다. 국제 기전이란 여러 나라의 프로 기사들이 동일한 룰로 경쟁하는 공식 세계 대회를 뜻합니다.
당시 세계 바둑 판도는 일본이 주도하고 중국이 추격하는 구도였습니다. 일본의 조치훈, 다케미야 마사키, 고바야시 고이치로 이어지는 3대 천왕 체제가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고, 한국은 사실상 변방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조훈현이 국내 타이틀을 거의 독식하며 일본 바둑계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고, 응창기배에서 그 정점을 찍었습니다.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이 대회의 독특한 룰입니다. 응창기배는 덤(집)을 여덟 집이나 부여했는데, 덤이란 먼저 두는 흑이 가진 선착 이점을 상쇄하기 위해 나중에 두는 백에게 보상으로 주는 집수를 말합니다. 당시 일반적인 덤이 5집 반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백에게 상당히 유리한 파격적인 규정이었습니다. 조훈현은 흑을 쥔 채 이 불리한 조건을 뚫고 우승했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 바둑을 배우면서 흑이 유리하다고 배웠는데, 덤 규정이 이렇게 승패를 좌우하는 변수가 된다는 걸 영화를 보며 다시 실감했습니다. 단순한 땅따먹기라고 생각했던 바둑이 이렇게 정밀한 수치 계산 위에 놓인 게임이라는 걸 어릴 때는 몰랐습니다.
사제관계, 조훈현과 이창호의 미묘한 심리전
세계 챔피언이 된 지 5개월 후, 조훈현은 전주의 한 소년과 마주칩니다. 바둑을 배운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이창호였습니다. 영화는 이 사제 관계의 출발을 꽤 공들여 묘사합니다. 솔직히 이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조훈현이 전주까지 내려가 직접 이창호와 접바둑을 두고, 석 점을 깔아도 역전당한 후 스스로 제자로 받아들이는 장면은 단순한 에피소드를 넘어 당시 바둑계가 얼마나 강렬한 승부의 세계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접바둑(接바둑)이란 실력 차이가 있는 두 기사가 약자가 미리 돌을 몇 개 올려놓고 시작하는 핸디캡 대국 방식입니다. 석 점 접바둑이면 이창호가 먼저 세 개의 돌을 올려놓은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의미인데, 이 상황에서 세계 챔피언이 역전을 허용했다는 건 단순히 '잘 둔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이창호는 서울 기원에 올라와 형들과 다면기(多面棋)를 두기 시작합니다. 다면기란 한 명의 기사가 동시에 여러 대국자를 상대로 바둑을 두는 방식입니다. 이 장면에서 유아인의 연기가 빛납니다. 웃으면서 말로 패배를 선언하는 이창호의 모습, 그러면서도 형들을 하나씩 꺾어가는 장면에서 천재성과 당돌함이 동시에 묻어납니다.
조훈현 선생으로서의 조훈현이 생각보다 엄격하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에서 그가 이창호에게 강조하는 건 기술보다 태도입니다. "승패가 다가 아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게 먼저다"라는 말은 포석(布石)과 행마(行馬)를 가르치는 것 이상의 무게를 가집니다. 포석이란 초반 대국에서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두는 전략적 배치를 말하고, 행마란 돌을 놓는 흐름과 방향성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가 기술의 기본인데, 조훈현은 오히려 그보다 더 깊은 곳을 건드렸습니다.
영화가 이 두 사람을 설정한 방식이 특히 좋았습니다. 일본은 조훈현의 바둑을 이해하지 못했고, 조훈현은 이창호의 바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로, 때로는 적으로 맞붙는 구조가 영화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승부철학, 이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영화 승부를 단순히 바둑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최고가 또 다른 최고를 길러내는 과정에서 어떤 내면의 균열이 생기는가'를 다룬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연달아 이기기 시작할 때 조훈현이 겪는 딜레마, 그걸 이병헌이 유머와 자존심과 쓸쓸함을 동시에 섞어 표현합니다.
이 영화에서 핵심 주제로 작동하는 건 기력(棋力)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기력이란 바둑 기사의 실력을 단(段)이나 급(級)으로 표현하는 역량 체계를 말합니다.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의 '9단'이 바로 최고 기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같은 9단끼리의 기력 싸움보다 '넘어서는 자'와 '넘어서이는 자'의 감정선을 더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영화가 잘 만든 지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조훈현이라는 인물을 영웅이 아닌 복잡한 인간으로 묘사한 각본
- 이병헌의 연기가 조훈현의 유머, 당혹감, 아우라를 고르게 소화한 점
- 현봉식, 고창석이 바둑을 모르는 관객에게도 형세 판단을 가능하게 해 준 조력자 역할
- 사제간의 불편한 동거를 억지 감동 없이 건조하게 담아낸 연출
솔직히 이 영화가 바둑 대국의 긴장감 자체를 세세하게 표현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둑을 아는 사람이라면 수 읽기나 사활(死活) 장면에서 디테일이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사활이란 바둑에서 돌 무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혹은 죽는지를 판단하는 핵심 기술 개념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디테일 대신 조훈현의 내면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오히려 영화적으로는 맞았다고 봅니다.
국내 바둑 인구는 한국기원 집계 기준 약 600만 명으로 추산된 바 있으며,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바둑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다시 높아진 것은 통계로도 확인됩니다(출처: 한국기원). 영화 승부가 그 연장선에서 개봉한 건 시기적으로도 절묘했습니다. 바둑이라는 소재가 낯선 관객도 '조훈현이 누구인가'라는 질문 하나만으로 충분히 극장 문을 열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한국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개봉 이후 승부는 꾸준한 관객 유입을 이어가며 스포츠 드라마 장르로는 주목할 만한 흥행을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 영화가 저에게 남긴 가장 큰 질문은 하나입니다. 내가 키운 사람이 나를 넘어설 때, 그것을 기뻐할 수 있는가. 조훈현이 그 질문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직접 보시는 걸 권합니다. 바둑을 전혀 몰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값어치가 있습니다. 어린시절 유행 따라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으로 바둑수업을 들었었는데 그때는 그렇게 재미없던 바둑이 이 영화를 계기로 다시 좋아지고 흥미가 생겼습니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극장에서 본 영화에서 많은 걸 가지고 나왔습니다.